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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의 기원

아파트주차스티커,무점착스티커-무무주차스티커/제제디자인 2006. 5. 24. 18:56
제목 제례의기원
 
 
  제사는 인류의 원시적 미개사회에서부터 시작되어 도덕과 질서의 근본이 되어왔다. 사회가 형성되고 사람들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제사문화는 발달되고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제사문화에 대한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기록은 별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삼국시대에 들어서야 자신의 조상을 제사 지내는 의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가 에서부터 먼저 시작된 삼국시대의 제사의례는 중국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데 제사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시기는 조선시대로 고려말에 이르러 성리학의 도입과 더불 어 '주사가례'에 따라 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지며 조상에 대한 제 사가 사회적 관습으로 장착되어 갔다.
 
 조선시대 예법의 표준은 왕실의 경우 '국조오례의'였고 민간의 경우 가례가 일반적인 예법서였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제사문화는 조선말기까지 유교 문화 속에서 사회전반에 걸쳐서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왔다. `관한 가장 오랜 문헌이 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은대의 갑골문에 제물로 기록된 것은 짐승과 노예들뿐이다. 이러한 제 사는 물론 서양에도 있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카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그것이다.
 
 카인 은 농사를 지어 곡식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목축을 하여 양을 제물로 드렸던 바, 하느님이 아벨이 올린 양만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심지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에 따라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단에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곧 양으로 대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제사에는 보통 술, 과일(대추, 밤, 감, 배, 기타), 밥, 국, 국수, 떡(편), 과자, 적(육적, 어적, 계적), 탕(육탕, 어탕), 전(육전, 어전), 포(육포, 어포), 나물, 김치 등을 제수로 올리고 있다. 이 밖에도 옛날에는 현주라고 부르는 정화수, 젓갈, 식혜, 식초, 간 등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 계절에 따라 생산도는 햇과일들이나 떡국, 송편 같은 것을 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제수를 통 틀어 청작서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형태의 제수는 산 사람을 대접할 때의 음식물과 유사한 것인데 이러한 예속은 대개 한, 당대 이후의 중국 서민사회의 조상제사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 로 보인다. 이것이 주자의 '가례'에 수용되어 오늘날의 표준예법처럼 되었다. 제수로 보통의 음식을 쓰게 된 것은 돌아가신 이를 산사람과 똑같이 모신다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 용'의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고, 없는 이를 섬기기를 있는 사람 섬기듯이 하 라"라는 교훈이 그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정신으로 생전에 드리던 음식을 사후에 제 사에도 올리게 된 것이다.
 사당이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이는 곧 조상의 영혼을 모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국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태묘(太廟), 제후국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종묘( 宗廟)라고 한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가묘(家廟)라고 한다. 일반 서민들 은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정침에서 부모의 제사만 올리게 되어 있었다. 또 공자와 여러 유교 선현들을 모신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는데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설치되어 있었 다. 그 밖에 지방의 저명한 학자들이나 명사들을 모신 사당을 향사당(鄕祠堂) 또는 사우(祠宇 )라고 불렀다. 이들 중 특별히 규모가 크고 교육 시설이 부설되어 있는 곳을 서원이라고 불렀 다.
 
 사당에는 목제 신주나 위패를 모시는 것이 보통이지만 초상화를 모신 사당도 있었는데 이 를 특히 영당(影堂)이나 진전(眞殿)이라고 불렀다. 국가에 특히 공을 세운 공신들은 생전에 초 상화를 그려 모신 사당을 건립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생사당이라고 한다. 사당 중에는 서울의 관왕묘처럼 동상이나 소상(진흙으로 만든 인물상)을 봉안하는 곳도 있었다. 사당은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설립된 곳이다. 따라서 제사는 원래 사당에서 올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장소가 협소한 경우에는 신주를 정침으로 모시고 와서 제사할 수도 있었다.
 
 사당은 기원전 12세기 이전 중국의 은나라에서부터 건립되었다. 은나라의 왕실에는 선조들을 제사하는 종묘가 있었는데 직계 조상들을 모신 큰 사당과 방계 조상들을 모신 작은 사당이 있 었다. 그들은 전자를 대종(大宗), 후자를 소종(小宗)이라고 하였는데, 종법 제도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은라라의 사당에서는 나무로 만든 신주를 봉안하였다. 은을 이은 주나라에서는 사당 제도가 매우 잘 정비되어 있었다. 중국의 고대의 종묘는 후대에서와는 달리 선조마다 각각의 사당을 지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나라마다 시조왕들을 제사하기 위한 사당들이 세워져 역대의 왕 들을 모시는 종묘로 발전하였다. 신라에서는 문무왕 때 전형적인 제후국의 5묘제 종묘가 설립 되었고 가야에서는 시조의 사당(수로왕묘)에 역대 왕들이 함께 모셔졌다. 이후 우리 나라의 왕실에서는 종묘를 세우는 것이 불변의 전통이 되었다. 일반 귀족들 사이에서도 사당을 모신 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문헌에는 잘 나타나 있진 않다. 또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불 교가 성행하여 유교식 사당은 그다지 많이 보급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 가 시책으로 문무 관료들에게 가묘를 세우도록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국가 시책에도 불구하고 가묘가 잘 세워지지 않았으나 성리학이 크게 발달하게 된 조선 중기부터는 대부분 의 양반 가문에서 가묘를 건립하게 되었다. 사당에 모시는 조상의 범위는 자신이 제사하는 조 상의 범위와 일치한다. 대종가의 경우에는 제사하는 조상의 범위외에 시조의 신주를 모시는 불천묘(不遷廟) 사당이 따로 있다.
 모든 제사에는 향사 대상자를 상징하는 신위(神位)를 설치하게 된다. 신위는 돌아가신 조상의 형체를 표상한 것이다. 신위에는 예로부터 시동,신주,위패,사판(위판이라고도함),소상,동상,초상화,지방 등이 사용되었고, 현대에는 사전도 사진도 사용되고 있다. 제사 중에는 이들 신위에 신이 깃들이는, 즉 의빙(依憑)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신주(神主)는 나무 위를 둥근 직육면에로 다듬어 그 위에 죽은 이의 친속 관계,관작과 봉사자의 이름등을 쓴것으로 중국 고대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신위의 상징이다. 신주에 사용되는 나무는 중국의 하나라 때는 소나무를, 은나라때는 잣나무를, 주나라 부터는 밤나무를 사용하였다. 이들 나무는 각기 그 나라의 사당이 있던 지역의 토양에서 잘 자라던 나무를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신주는 두 쪽의 나무판을 맞대어 제작하는데 앞판에는 한가운데에 죽은 이의 친속,관작,시호 들을 쓰고 그 왼쪽에 봉사자의 친속과 이름을 쓴다. 뒤판에는 한가운데 아래로 겔게 홈을 파고 거기에 죽은 이의 관작과 성명을 쓴다. 뒤판의 좌우에는 바람이 통하도록 둥글게 구멍을 뚫어 둔다. 신주는 이 두 판을 맞붙여 받침대에 꽂아 세워 나무 상자 속에 담아 보존한다. 신주는 장례식 때 묘지에서 제작되어 3년간 빈소에 모셨다가 담제를 지낸 후 사당에 모신다.
 
 위패는 그 형태가 신주와 비슷하지만 제작법은 간단하다. 단순히 한토막의 직육면체 나무를 다듬어서 그 위에 죽은 이의 친속과 관작 등을 쓴것으로 약식 신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주로 불교 사찰에서 사용되고 있다. 위판이라고도 하는 사판은 신주의 형태의 넓적한 목판에 죽은 이의 관작이나 호 등을 쓴것으로 성균관,향교,서원,사우 등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
 
 지방은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신주 대신에 일회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사당의 건설이나 유지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웬만한 집이 아니면 신주를 모시지 못하고 그 대신 지방을 사용했다. 지방은 제사 직전에 만들었다가 제사를 마치면 소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제작이나 관리가 매우 간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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